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 윤정진이 조선 영조 때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지붕은 모두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윤황선생은 시조로부터 23세이고 윤정진선생은 30세이다. 그러므로 윤정진은 윤황의 6대손이 아니라 7대손이네요. 그리고 현장안내판에는 아직도 민속문화재를 민속자료로 되어 있습니다.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 : 항상 우리 도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 업무에 애정을 가져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건의하신 사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여 드립니다.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8호 윤황선생고택의 문화재청 홈페이지 및 문화재 안내판의 내용 오류에 대한 사항은 논산시에 통보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수정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귀하의 고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앞으로도 우리 도 문화재 행정에 애정과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윤황의 생년이 1571년인데 1572년으로 되어 있요.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 : 평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문의하신 사항은 홈페이지 확인 후 바로 수정 조치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문화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리며,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이XX(042-481-48XX)에게 연락주시면 상세히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황선생의 호는 팔송이며,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터를 잡고 파평윤씨 노종파의 근간이 되게 하신 참판공 윤창세(1543~1593)의 둘째 아들이다. 참판공은 5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자 깃발을 꽂고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윤황은 8명의 아들(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 민거, 경거, 시거)를 두었는데 모두가 훌륭하여 8거라 칭하였다. 임금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많은 벼슬을 받았던, 그러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백의 정승이라 하며 우암 송시열과 맞서 당파 싸움했던 소론의 영수 윤증(명재 윤증 특별전, http://blog.daum.net/dbsqkqh/1193)은 다섯째 아들인 선거의 아들이다. 본인은 4째 아들인 석호 윤문거의 후손이다. 둘째 아들인 동토공 순거는 큰아버지인 설봉공 수에게 양자로 감.
근거리에는 논산윤황선생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391호, http://blog.daum.net/dbsqkqh/3913)이 있다. 노성면소재지 방향으로 약 5km 가면 논산 명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190호, 명재 윤증은 윤황의 손자, http://blog.daum.net/dbsqkqh/1367)이 있다.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4년인 1571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감찰, 정언, 좌랑등의 관직을 거쳐 북청판관, 영광군수 등의 외직을 거치고 시골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하여 장령, 집의, 사간 등의 관직을 지내던 중 정묘호란 때 화친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이듬해 복직하여 안변 부사, 대사성, 대사간·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은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척화신중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 홍익한은 불모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가고 공은 동양위, 신익성의 도움으로 영동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1638년) 겨울 풀리시어 노성으로 귀가하셨다가 1639년 69세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논산의 노강서원, 영광의 용계사우, 영동의 초강서원, 전주의 반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가 있다. 호가 팔송인 이유는 공이 사신 곳이 남별영이 있던 지금의 필동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 쌓여 있었고 이곳에서 샘이 솟아올라와 팔송정이라 불리운데서 비롯된 것으로 공의 사부이며 후에 장인이된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이 명명해 주셨다.
본인은 윤황의 넷째아들 석호공 문거의 후손이다.
윤황 사당
아래의 윤황 부조지전 편액은 1798년(정조22년) 4대 봉사가 끝난 윤황의 사판(祠版)을 옮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조가 윤황의 부조묘를 세우도록 명하고 하사한 것이다. 부조묘는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말한다. 불천위란 4대 봉사가 끝난 뒤에도 사당을 세워 영구히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석가래 아래에 걸려 있었는데 많은 유품은 도둑을 맞을 때 다행히 이 어제 현판은 남아 현재는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윤황선생고택에 대한 기사 : http://news.suwon.ne.kr/main/section/view?idx=703871
그 후 현장에서 만난 팔송 할아버지의 후손인 윤여동님께서 메일이 왔네요.
" 논산시에서 오류가 있던 안내판을 철거하고 2013.7.26 오늘 오전에 새로 설치하였습니다.
새로 설치한 안내문 문안은 본인이 써서 논산시 문화관광과에 준 것입니다."
윤여동님께서 보내주신 안내판 사진
2006년 3월, 파평윤씨 노성종학당(공주대학교박물관 발행) 188쪽. 윤황할아버지의 생년이 1572년으로 인쇄.
1995년 7월, 종학훈강강의록(파평윤씨노종파병사대종중 발행) 144쪽. 윤황할아버지의 생년이 1561년으로 인쇄.
1995년 7월, 종학훈강강의록(파평윤씨노종파병사대종중 발행) 168쪽. 매촌공의 휘가 '단'으로 되어 있고, 윤선거가 팔송의 여섯째로 인쇄되어 있네요.
1995년 7월, 종학훈강강의록(파평윤씨노종파병사대종중 발행) 169쪽. 아들이 여덟 모두 현달하여 팔(8)거로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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