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에 있는 주소인 퇴촌면 도마리 산11-1번지는 워낙 넓어 찾기가 쉽지 않다. 도마리 194-5로 찾아 가세요. 묘소 입구입니다.
퇴촌면소재지에서 88도로를 타고 광동교를 건너 도마삼거리 가기전에 지하차도로 좌회전한다.
도마리쪽으로 직진한다.
최항선생묘는 사진에서 가운데 산 중턱에 있다.
좌회전하면 주말농장이 있는데 적당한 곳에 주차한다.
진입로를 막아 놓았다. 종손왈 외지인이 자주와서 몹쓸짓을하여 막는단다.
가운데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묘소가 있다.
최항선생의 묘비 복원. 서거정이 지은대로 복원하였단다.
할미꽃이 무성히 자라고 있다.
묘소에서 바라본 종손집
최항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현장 안내판에 건너편에 신도비가 있다하여 찾아 보아도 없다. 한참을 헤매다가 마침 종손을 만나 물으니 88도로 옆에 있단다.
최항선생 묘소 북측 신라수석농원 근처에 있다. 사진에서 가운데 큰 전봇대 뒷편에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동량(동梁) 최항(1409∼1474) 선생의 묘소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종 27년(1445)에는『용비어천가』를 한글로 풀이하였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선생은 40여 년간 조정에서 많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동국통감』,『경국대전』,『세종실록』,『세조실록』등 각종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문장력이 뛰어나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고 서적들을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개인 저서로는『태허정집』,『관음현상기』가 있다. 봉분 뒤는 반달 모양으로 흙을 둘러 쌓았고 봉분 아래에는 반원 모양의 돌을 이용하여 봉분 끝을 마무리 하였다. 봉분 좌우에는 봉분을 향해 2기의 묘비가 있는데, 우측의 묘비는 당시에 있던 것이고, 좌측 묘비는 선생의 17대손이 세운 것이다. 봉분 앞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배치되어 있고 산 아래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문신이며 대학자인 최항(1409∼1474)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자(字)는 정부(貞父), 호(號)는 동량(동梁),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며 본관(本貫)은 삭령(朔寧)이다. 세종(世宗) 16년(1434)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하여 1443년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가 되어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주해(註解)하였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을 편찬하였고,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하였다. 단종(端宗) 원년(元年)(1453)에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가 곧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세조(世祖) 원년(1455)에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이 되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세조(世祖) 9년(1463)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466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예종(睿宗) 원년(1469)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쳤다. 선생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 관료로서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공을 세웠고 역사(歷史)·어학(語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문장을 잘 지어 명(明)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많이 지었다. 경내에는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문관석(文官石), 석등(石燈)과 비석이 있다.(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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