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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신흠묘역및신도비(경기도 기념물14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6. 22. 19:03

  문화재청에 있는 주소인 '퇴촌면 영동리 산12-1번지'는 너무 넓어 찾아가기 어렵다. 근처인 퇴촌면 영동리 31-1로 찾아간 후 적당히 주차한 후 걸어가기를 권해 본다. 신도비와 묘소를 보는데 30여분이면 된다.  신도비를 지나 묘소입구에서 U턴할수 있으나 도로가 너무 안좋다.

 

 

  문화재청에는 '선조 18년(1585)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 안내판에는 '선조19년(1586)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 : 1. 우리시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2. 귀하께서 문의하신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 신흠묘역 및 신도비의 문화재청 문화재 정보와 현장에 설치된 문화재 안내판 내용의 불일치’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여 정정토록 하겠으며, 
        3. ‘문화재 안내표지판의 위치 변경 및 추가 설치’에 대하여는 현장상황을 반영하여 효율적인 문화재 안내가 될 수 있도록 점차 정비할 계획이오니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4.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우리시 문화재팀(☏760-48XX,48YY)으로 문의하시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사중인데 좌회전하라는 안내판이 보이네요. 다리를 건너 50여m를 간다.

 

 

트럭 뒤에 있는 산밑 길로 좌회전한다.

 

 

신도비는 주택 근처에 있다.

 

 

나무사이로 신도비가 보인다.

 

 

 

 

 

 

 

 

 

  신흠의 묘는 좀더 직진한다. 여기서 한가지 건의할 것이 있다. 안내판 반대쪽에도 같은 안내글씨가 있는데 누구을 위한 것인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좀더 직진하여 있는 신흠 묘소 안내판은 좀 문제가 있다. 신흠묘소만 화살표 방향에 있고 신도비는 사진 오른쪽에 있다.

 

 

 

조금만가면 안내판이 있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묘소는 우회전한다. 

 

 

그런데 안내판이 글씨가 없는 뒷면만 보인다. 누구을 위한 안내판인지??? 

 

 

  반대편에서 본 안내판. 신도비옆에 있는 안내판은 필요없는 양쪽인데, 정작 필요한 이곳은 한쪽만 있다. 반대쪽길로 내려와서 신흠묘소에 답사갈 사람은 없어 보인다. 또 신흠묘소는 왼쪽으로 가면 되지만 신도비는 사진에서 보이는 길로 직진해야 된다. 신도비와 신흠 묘소의 방향이 다른데 안내판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산길로 직진하여 올라간다.

 

 

좀더 올라 가면 잔디가 잘 자라고 있는 곳이 나온다.

 

 

삼거리인데 우회전 한다.

 

 

커브를 돌면 신흠묘소이다.

 

 

 

 

 

 

대부분 부인의 내용이 왼쪽에 있는데, '증 정경부인 전의이씨'라는 글씨가 오른쪽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현헌(玄軒) 신흠(1566∼1628) 선생의 묘이다. 선조 18년(1585)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였으나 율곡 이이를 두둔한 발언으로 인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으로부터 이이와 같은 무리라고 비난을 받으면서 높은 벼슬을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이후 병조판서를 거쳐 인조 때에는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임을 받았고, 특히 외교문서의 제작과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묘지는 부인 전의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역 주위는 낮은 구릉으로 둘러 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床石: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한 돌)·향로석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있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그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과 문인석이 있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세운 것으로 그가 손수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묘역의 동남쪽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연간의 문신이며 한문학의 정종(正宗)으로 칭송되었던 신흠(1566∼1628)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다. 상석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건립된 것으로 후면에 그가 순수 작성한 비문이 세워져 있다. 숙종(肅宗) 25년(1699)에 건립된 신도비는 묘역의 동남쪽 약 200m 지점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이수(이首)·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다. 총 높이 335㎝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신흠은 선조 18년(1585)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차례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이이(李珥)를 두둔한 말로 인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東人)으로부터 이이의 무리라는 배척을 받고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가 곧 경원훈도(訓導)·광주훈도를 거쳐 감찰(監察)·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정철(政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여 지평(持平)으로 승진되고, 이어 사성(司成)·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判書) 등을 역임하였다.광해군(光海君) 때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조 때에 예문관(藝文館)·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하였다. 또한 대명 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 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145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