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양주 해유령전첩지(경기도 기념물39호)

천지연미소바위 2014. 7. 7. 20:24

  해유령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임진왜란 때 육지 싸움으로는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첩지이다. 1592년 6월25일 왜군 70여명 격퇴한 곳이다.

 왜적이 동래로 들이닥쳐 국토를 유린하자 조선의 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고,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국왕이 달아났다는 소식에 군의 사기는 엉망이고 왜군에 맞설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다. 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한 도원수 김명원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진지를 벗어나 임진강 방면으로 달아났다. 부원수 신각은 한강을 포기하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서 병사들을 수습했다. 신각은 양주에서 개성과 함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해유령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 정예 선발대는 양주 일대를 약탈한 뒤 625(음력 516) 해유령을 지나려 했다. 해유령에서 신각은 왜군 70여명을 몰살시켰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 최초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신각 장군은 해유령 전투에서 승리한 지 3일 뒤인 1592628(음력 519)에 비운을 면치 못했다. 북으로 달아난 뒤 한강 방어선과 도성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한응인을 보내 김명원에게 패전을 질책했고, 김명원은 신각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이탈해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고 책임을 신각에게 전가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흥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신각을 처형하라는 어명을 받든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선조에게 신각이 올린 전승보고서가 왜군의 수급 70여개도 함께 도착했다. 사태의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후발 선전관을 양주로 보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먼저 보냈던 선전관이 어명을 실행했고, 신각은 영문도 모른 채 승리 3일 후 처형당했다.

 

 

 

 문화재청에 '백석읍 연곡리 산38번지'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백석읍 연곡리 산28-9번지'에 있네요.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내용

안녕하십니까? 양주시청 문화관광과입니다.

우선, 우리시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감사드리며, 문의하신 내용에 답변드리겠습니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39호 해유령전첩지는 소재지가 지번주소로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28-9번지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 검색 확인 결과 소재지가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 80번지로 잘못 표기되어 있어 경기도 문화유산과 기념물 문화재 담당자에게 정정 요청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풍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시 문화유산에 대해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문의사항 있으시면 양주시청 문화관광과 문화재 종무팀 (031.8082. 56XX)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발랑저수지쪽에서 360번 도로를 타고 광적면소재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있다.

 

 

 

 

 

 

 

신각장군을 기리기 위한 사당.

 

 

 

 

 

 

 

 

  해유령 전첩지는 선조 25(1592)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이다. 당시 신각·이양원·이흔 장군의 합동작전으로 지형적으로 유리한 해유령에서 왜병 70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둬 조선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도성 남쪽 한강 방어선에서 왜군을 막지 못한 김명원은 자신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 책임을 신각 장군에게 뒤집어 씌워 장군은 처형되었다. 1977년 국난극복의 전승을 기념하고 억울하게 죽은 신각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높이 10.6m의 비를 세웠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39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