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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정난종선생묘 일원(경기도 기념물 11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6. 2. 13:29

조선 전기의 문신 허백당 정란종(1433∼1489) 선생과 그의 두 아들 광보(1457∼1524), 광필(1462∼1538)의 묘지이다. 정란종은 세조 2년(1456)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467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호조참판에 올랐다. 사신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던 그는 훈구파의 중진인사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특히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광필은 성종 23년(1492)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있으면서『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 5년(1510)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묘역은 견불산의 능선 중앙에 정란종 선생의 묘가 있고, 그 위로 장남인 광보, 차남인 광필의 묘가 차례로 있다. 모두 부인과의 합장묘이고, 봉분이 2개씩인 쌍분 형태이다. 정란종의 묘는 부인 완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성종 20년(1489)에 세운 선생의 묘비와 성종 17년(1487)에 세운 부인의 묘비가 있다. 묘역 앞에는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이 있고, 그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해 만든 돌로 된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묘역 좌우에 크기가 다른 문인석 2쌍이 있고, 묘역 아래에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신도비가 있는데, 남곤이 글을 지어 중종 20년(1525)에 세운 것이다. 정광보의 묘 역시 부인 전의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 묘비,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로는 동자상이 1쌍 있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있고, 장명등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정광필의 묘도 부인 은율 송씨와의 합장묘이며, 묘 앞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고 상석 앞에 장명등이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 1쌍이 있으며, 묘역 좌측 아래에는 소세양이 글을 짓고 이황이 글씨를 써서 명종 17년(1562)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본 묘역은 견불산((見佛山), 일명 수리산)을 후산(後山)으로 하여 동남향 하단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능선 하단부 중앙에 정난종(143∼1489)의 묘소가 있고 그 후면 위로 그의 장남 광보(1457∼1524)와 차남 광필(1462∼1538)의 묘소가 차례로 있다. 정난종 선생 묘(鄭蘭宗先生墓)의 봉분은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 화관석(花冠石) 묘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건립 연대는 좌측 그의 묘비가 조선 성종(成宗) 20년(1489), 우측 부인의 묘비가 성종 17년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대형·소형의 문인석 2쌍이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좌측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이수(이首)·비신(碑身)·기대(基臺)·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며, 그 밑으로 운문(雲文)이 장식되었고 전체적인 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남곤(南袞)이 찬(撰)하여 중종(中宗) 20년(1525)에 건립한 것이다. 정난종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우참찬(右參撰)에 올랐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했다. 정광보선생 묘(鄭光輔先生 墓)의 봉분은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바로 좌우에는 동자상(童子象)이 있으며, 상석 전방에는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다. 장명 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기대에 꽂아 세우는 구조이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있다. 건립 연대는 중종 19년이다. 묘소 좌측 아래에는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는데 2단의 대좌를 만들고, 그 위에 귀부(龜趺)를 놓고 비신과 이수를 얹어 놓은 형식이다. 이수 역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그 문양이 섬세하다. 비문은 이행(李荇)이 찬하여 중종 20년에 건립한 것이다. 정광필선생 묘(鄭光弼先生 墓)의 봉분은 부인 은율송씨(恩律宋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 이수·비신·기대의 구조를 갖춘 묘비가 있고,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장명 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소 좌측 아래에 있는데 2단의 대좌 위에 장방형의 기대를 놓고,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은 것으로 이수의 섬세하게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은 사실적이다. 비문은 소세양(蘇世讓)이 찬하고, 이황(李滉)이 글을 써서 명종(明宗) 17년(1562)에 건립한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정난종선생묘. 위로 큰아들 정광보 묘, 그 위로 둘째 아들 정광필묘가 있음.

 

 

 

 

 

 

 

큰아들 정광보 묘

 

 

 

 

큰 아들 묘에서 내려다 본 정난종 묘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1150000,31&queryText=((V_KDCD=23)) <and>(((V_NO >=115)<and>(V_NO <=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