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양평 한음이덕형선생묘및신도비(경기도 기념물89호)

천지연미소바위 2016. 11. 5. 19:57

한흠 이덕형 묘소가 있는양서면 목왕리 산82-1’는 매우 넓다. 신도비가 있는 주소도 마찬가지이다. 은행나무 앞인 양서면 목왕리 623-1’에 주차하는 것을 권해본다. 아래 지도에서 4번 위치이다. 사당 입구인 5번 위치에도 작은 주차 공간이 있다. 두 곳 모두 넓지는 않지만 몇 대는 가능하다.




1. 이덕형 신도비

2. 이덕형 묘소

3. 사당




이덕형 신도비이다. 좁은 철다리로 간다.












신도비에서 바라본 이덕형 묘소. 보이는 산 가운데에 있다.




600년된 은행나무






이덕형 묘소와 사당 입구. 작은 주차 공간이다.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철다리를 건넌다. 사당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당 이름은 호인 쌍송을 따서 지었다. 보통 '한음'을 많이 알고 있다.



묘소는 왼쪽 사당 담장 옆으로 올라 간다.

















한음 이덕형 묘소에서 바라본 신도비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 가면 아버지 이민성 묘소가 있다.










이민성 묘소에서 바라본 한음 이덕형 묘소




내려 오다가 이덕형 묘소에 있는 문인석을 다시....




동자석 목이 금이 갔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 선생의 묘 및 신도비이다. 선조 13(1580)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선조 25(1592)에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선생은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위하였고, 명나라에 파견되어 지원군 요청에 성공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에 우의정·좌의정이 되어 전후의 사태를 수습하였으며, 1602년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5(1613)에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사직하고, 그 뒤 양근(楊根)에 내려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부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며,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묘비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역 아래 300m 지점에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효종 4(165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조경(趙絅)이 지은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89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