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19

영동 신항리 상여(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율리교차로에서 용산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구촌교를 지나 오른쪽에 상여가 있다. 건물이 서향으로 지는 해를 받게 되어 있어 문화재 휀손이 우려된다. 이용강 대감의 장례 때 시신을 묘소까지 운반하기 위해 제작된 기구이다. 이용강은 조선 고종 때 경상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영동 황간으로 낙향하여 노년을 지내었다 한다. 상여는 세도있는 양반가의 것으로서, 민간층에서 사용하는 상여와는 다르게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올리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을 넓게 드리웠다. 몸체의 아래 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검은 천을 덮은 뒤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다. 윗 난간에는 동방삭(삼천갑자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으로 보이는 인물상을 여러 개..

영동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6호)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 선생이 서재를 짓고 강학하였던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몸 앞면에 ‘우암송선생유허비’라 새겨 놓았다. 조선 고종 12년(1875) 선생의 후손과 유림들이 비를 세웠다.(출처 : 문화재청) 옥천에도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t..

영동 한천정사(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 후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었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을 철거하였고 후에 후학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끝에 온돌방을 두었다.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앞면에 문을 두었는데 앞면 양측에 은행나무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지금은 은행나무가 없어요.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옥천 이원면 구룡리 마을회관 근처에 주차한다. 유허비 비각 지붕이 보인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함평 수벽사& 임천정사

임천정사 : 파평 윤씨의 제실. 입향조 윤길이 지었다. 한때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였다 수벽사 : 느티나무 숲 물레방아 옆에 자리 잡은 수벽사는 고려시대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은 윤관(?∼1111년)장군을 모신 사당 고려국 한림학사 둔옹 퍄평 윤선생 신도비 퍄평윤씨 대언공 장방손 한림공파 유래비 앞에는 해보면 상곡리 635번지에 모평 마을 숲이 있다. 신천강씨 열녀비 :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해 두 팔이 잘리면서까지 남편 윤해의 죽음을 막으려했던 강씨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 충노비 : 윤해와 신천강씨 부인이 죽임을 당하자 이 소식을 들은 장남 17살 청립은 노비였던 도생과 사월에게 4살짜리 동생(정립)을 부탁하고 전쟁터로 달려 나갔으나, 청립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생과 사월은..

함평 사산사

사산사는 함평 해보천이 고막원천으로 합류하는 곳인 나산면 초포리에 있는데 함평이씨 시조를 추모하는 곳이다. 함평이씨 시조는 고려 건국에 참여하고 신무위대장군에 오른‘함풍군 이언’이다. 이 마을은 함평이씨 집성촌이며, 조선 초기 건축형태로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인함평‘이건풍가옥’이 있다. 건물이 오래되어 보이는데 왜 문화재로 등록이 안 되었는지.... 근처에 있는 이규행 가옥을 찾다가 우연히 가본 곳이다.

함평예덕리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제55호)

22년 5월에 가본 함평 예덕리 고분군이다. 예덕 저수지와 용암 저수지 사이에 있는 연정재에서 동으로 흘러내린 낮은 구릉에 위치한 무덤들이다. 현재 12기의 무덤이 남아있으나 10여 년전 개간 당시 많은 무덤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 무덤들은 그 배치상태에 있어서 다른 무덤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남북 또는 동서로 축을 두고 3개씩 무리지어 가지런히 붙어 있는데, 이러한 배치상태로 앞이 네모나고 뒤가 둥근 전방후원무덤 형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주변에서는 대형항아리관조각들이 수습되어 이 무덤들을 4∼5세기에 걸치는 백제의 독무덤(옹관묘)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학술조사가 없어 무덤의 형태나 내부구조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알 수 없다. 함평 예덕리 무덤들은 영산강 하류의 독무덤 분포지역에 속하는 곳..

함평예덕리신덕고분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43호)

22년 5월에 가본 함평 예덕리 신덕 고분군이다. 문화재청에 주소가 ' 예덕리 산176번지'로 되어 있는데 ' 예덕리 산177번지'에 있다. 멀리 고분이 보인다. 낮은 평지성 구릉에 분포하고 있는 무덤들이다. 남북으로 배치된 2기의 무덤 중 남쪽의 대형 무덤은 봉토가 앞쪽이 네모난 형태이고 뒤가 둥근 전방후원 형태이고 북쪽의 무덤은 원형이다. 전방후원 형태의 무덤 구조는 굴식(횡혈식)으로 돌방(현실)의 4면은 아래에 넓은 판돌을 세우고 위는 네모진 깬돌로 촘촘하게 쌓은 후 사이에 작은 깬돌을 끼운 맞조립식으로 세웠다. 천정은 2장의 판돌로 덮었으며 입구는 문비석으로 막고 그 밖을 막음돌로 쌓았다. 출토된 유물은 다량의 토기와 철기류, 철판이 있는데 백제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예덕리 신덕무덤들은 삼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