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문화재 7

경주 감은사지(사적 제31호)

감은사지 동편에 주차장(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2-1)이 있다. 경주 감은사지에 있는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http://blog.daum.net/dbsqkqh/5761)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절 부근의 대왕암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탑은 국보112호이고, 감은사지 전체는 사적 제31호(blog.daum.net/dbsqkqh/5762)이다.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

경주 독락당 조각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

경청재 왼쪽으로 가야 볼 수 있는데 출입 금지 표지판이 있어 담장 밖에서 실례했다. 독락당의 조각자나무는 나이가 약 47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둘레 4.90m(62cm높이)이다. 이 나무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주변은 감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우나 밑부분과 2개의 가지만 살아있어 나무의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이 나무는 조선 중종 27년(1532) 회재 이언적이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할 때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부터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오래되고 희귀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독락당의 역사를 알려주는 문..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경주 독락당은 옥산서원 북측으로 약600여m, 10분 거리에 있다. 이이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자동차로 옥산서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10월에 포항에서 생질 아들 결혼이 있어 대전에 사는 형님부부와 같이 갔다가 형님이 갑자기 옥산서원에 가보자하여 갔다. 사전 지식 없이 갔기 때문에 옥산서원에서 관광객의 추천으로 옥산서원 세심대쪽으로 우리 부부만 독락당에 걸어서 갔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

경주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신도비는 옥산서원 안에 있어 오른쪽으로 간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으로 곱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主理論)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曺漢輔)와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을 통하여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 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 의해 계승 발전 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後學)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碑文)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경주 옥산 서원은 오른쪽으로 간다. 귀후재, 독락당,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는 왼쪽으로 간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

봉길대왕암해변(경주시 양북면 동해안로 1366-9) 앞에 위치한다. 대왕암이라고도 하는데 울산에 있는 대왕암과는 다른곳이다.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