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 문화재 8

경주 이언적 수고본 일괄(보물 제586호)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http://blog.daum.net/dbsqkqh/5758) 참조 보물사진 출처 : 문화재청 보물 제586-1호 이언적 수고본 일괄 – 속대학혹문 이언적 수고본 일괄-속대학혹문(李彦迪 手稿本 一括-續大學或問)은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김안로를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다시 정치에 나섰고, 후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서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47년 조작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그..

경주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보물 제526호)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http://blog.daum.net/dbsqkqh/5758) 참조 아래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보물 제526호)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 해동명적(驪州李氏 玉山門中 遺墨 - 海東名蹟)』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탁..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

경주 옥산서원에 예정없이 갔다가 들른 곳이다. 탑이 특이하고 예쁘네요. 옥산서원에 가시거든 꼭 찾아 보아요.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경주 귀후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8호)

경주 귀후재는 경주 독락당 근처에 있어 왼쪽으로 간다. 문화재청에는 귀후재 주소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1-2(옥산리 1562-1)’로 되어 있는데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301-4(옥산리 1562-1)’이다. 문화재청에 이미지 사진이 잘못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문화재과 054-779-6110~9로 전화하여 수정 부탁했네요. 조선후기에 가면 각 마을마다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한 서당, 강학당을 건립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귀후재도 이 범주에 속하는 문중자제들을 위한 강학당이다. 역사적인측면에서 귀후재는 옥산에 약 450여년간 세거해온 여강이씨의 대표적인 강학당(講學堂)이라는 점에서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인근 양동마을의 대표적인 서당인 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문화재 ..

경주 독락당 조각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5호)

경청재 왼쪽으로 가야 볼 수 있는데 출입 금지 표지판이 있어 담장 밖에서 실례했다. 독락당의 조각자나무는 나이가 약 47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둘레 4.90m(62cm높이)이다. 이 나무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독락당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주변은 감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우나 밑부분과 2개의 가지만 살아있어 나무의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이 나무는 조선 중종 27년(1532) 회재 이언적이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독락당을 짓고 학문에 전념할 때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친구로부터 종자를 얻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오래되고 희귀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류관계와 독락당의 역사를 알려주는 문..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경주 독락당은 옥산서원 북측으로 약600여m, 10분 거리에 있다. 이이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자동차로 옥산서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10월에 포항에서 생질 아들 결혼이 있어 대전에 사는 형님부부와 같이 갔다가 형님이 갑자기 옥산서원에 가보자하여 갔다. 사전 지식 없이 갔기 때문에 옥산서원에서 관광객의 추천으로 옥산서원 세심대쪽으로 우리 부부만 독락당에 걸어서 갔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

경주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신도비는 옥산서원 안에 있어 오른쪽으로 간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으로 곱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主理論)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曺漢輔)와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을 통하여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 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 의해 계승 발전 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後學)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碑文)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경주 옥산 서원은 오른쪽으로 간다. 귀후재, 독락당,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는 왼쪽으로 간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