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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묘(충청남도 기념물73호)

김좌진장군 묘소 뒤에 있는 묘소인데 상석을 보면 김형규진사, 부인 한산 이씨 묘로 되어 있다. 장군 묘소 옆에 있는 비문을 보면 장군은 김형균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장군묘소 뒤에 있는 분은 누구인지? 소나무가 받침대를 감싸고 들어 갔네여. 김좌진장군은 김형균의 둘째아들로 되어 있다. 비문이 오자가 아닐런지... ◦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이며, 호는 백야로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저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인 북로군정서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3천여 명을 살상하는 커다란 승리를 올렸음. ◦ 이 청산리 대첩은 우리나라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임. ◦ 1930년 1..

광성부원군 사우(충청남도 문화재자료143호)

문화재청에는 '송덕신송길 457-24'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청소면 재정리 산 71-11'에 있어요. 1. 광성부원군 사우 2. 광성부원군 김극성 묘소 3. 광성부원군 신도비 신도비 신도비 앞 600년된 느티나무이다. 돌을 품고 있는줄 알았다. 상처난 곳을 치료해 주었단다. 사우 왼편에 묘소가 보인다. 묘소에 올라 가는 계단이다. 광성부원군 김극성 묘소 정경부인신평이씨 묘소 사우와 오른쪽으로 신도비가 보인다. ◦ 보령출신의 조선전기 문신인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청라면 장산리에 세웠던 것을 청천저수지의 조성으로 수몰지구가 되자 1960년 후손들이 그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옮겼음. ◦ 보령지역에는 김극성의 후손인 광산 김씨들이 유력 ..

화암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138호)

◦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충청관찰사 정엽(鄭曄)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具繼禹)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숙종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설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음. ◦ 처음에는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과 명곡 이산보(鳴谷 李山甫)를 모셨고, 이어서 1723년에는 천휴당 이몽규(天休堂 李夢奎), 고종조에는 퇴우당 이정암(退優堂 李廷馣), 1971년에는 수암 구계우 등 5분의 위패를 모셨음. ◦ 1988년에는 이지함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음. ◦ 서원의 구조는 2단으로 된 터의 앞에는 동재, 서재, 강당, 관..

보령장현리귀학송(충청남도 기념물159호)

가운데 멀리 귀학송이 보인다. 지금은 한가지가 죽어 6가지가 아니고 5가지네여. 귀학송 주변에 있는 소나무. ◦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동생이며,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동계(東溪) 이산광(李山光, 1550~1624)이 광해군의 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시와 글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지은 정자가 귀학정(歸鶴亭)이었음. ◦ 이후 이 곳에는 이산광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왔고, 그의 6대손인 이실(李實, 1777~1841)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서로 다른 뿌리에 6가지로 뻗은 수형의 소나무로 성장하여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귀학송(歸鶴松) 또는 육소나무로 불리기도 함 정자에 학들이 날아와 ‘귀학정(歸鶴亭)’이라 하였고, 서로 다른 두 뿌리에 ..

신경섭가옥(충청남도 문화재자료291호)

◦ 조선후기의 팔작지붕으로 된 ㄱ자형의 사랑채와 ㅡ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져 ㄷ자형의 구조를 이룸. ◦ 안채에는 안방․대청․건넌방․고방․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되었는데, 사랑방 옆에 높은 누마루를 들여 전원을 조망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음. ◦ 상량문에 숭정기원후계묘라 씌어져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고택임을 알수 있으며, 가옥의 동족 대문에는 신석붕의 효자정문 현판이 걸려있음.(출처: 문화재청)

동해 송정동 철기시대유적(강원도 기념물84호)

22년 1월에 다녀온 동해 송정동 철기시대유적 송정동 초기철기시대유적은 동해시의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전천(箭川)하류의 북쪽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96년 관동대학교 박물관이 유적의 남쪽 부분인 동해항만 확장지역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주거지 4기와 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대롱옥, 곱은옥, 유리구슬, 은제귀걸이 등을 수습하였다. 1999년과 2000년에는 강릉대학교 박물관이 송정동 중심도로 건설지역과 인근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 주거지 45기와 9기를 각각 발굴하여 송정동 일대가 당시 대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부 철(凸)자형인 움집이었으며, 벽은 판자를 이용하였고 화덕자리는 점토띠식, 아궁이식, 무시설식 등 다양하였다. 특히 2호 집자리..

동해 구 삼척개발 사택과 합숙소(국가등록문화재)

22년 1월에 가본 동해 구 삼척개발 사택과 합숙소. 정문이다. 처음에는 오른쪽에 있는 건물에 찾아 갔다. 아무리 찾아도 안내판이 없다. 왼쪽에 있는 건물들이다. 넓은 공간에 주차하니 한쪽에 안내판이 있다. 일제 강점기 민간회사의 사택으로, 직급과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분하여 구성한 근대기 근로자 주거사의 중요한 자료로서 보존가치가 높다.(출처 : 문화재청)

동해 신재공 심동로 신도비(강원도 문화재자료149호)

22년 1월에 가본 동해 신재공 심동로 신도비. 북평 해암정(여행&사진 (daum.net))과 관련이 있다 이 비는 고려말 문신인 信齋公 沈漢의 神道碑이다. 심한이 1361년(공민왕10)에 벼슬을 버리고 삼척으로 낙향하자 공민왕이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東老”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후에 眞珠君에 봉하여졌다. 비는 동해시 발한동 시가지 도로변에 접하여, 도로를 제외한 주위가 민가에 둘러싼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高麗禮儀判書號信齋沈公神道碑銘’이라는 篆이 있고, 전면에는 신재공의 선조와 공의 내력, 후면에는 기문과 후손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나 측면에는 내용이 없다. 비문은 사헌부대사헌 겸 경연관원자우유선인 李城輔가 撰하고, 글씨는 前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지제교인 李錫祐..

동해 구 상수시설(국가등록문화재 142호)

22년 1월에 가본 동해 구 상수시설. 동해시 농업기술센터 안에 있다. 동해시농업기술센터에 주차하고 왼쪽으로 가면 있다. 일제강점기 산업시설로 당시의 기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및 근거가 되며, 최근까지 정수시설로 사용되어 온 시설로서 보존상태가 비교적 우수하다.(출처 : 문화재청)

용산서원 학규현판(강원도 유형문화재78호)

22년 1월에 가보았는데 문이 잠겨있어 담장 밖에서... 문화재청에 주소가 '동해시 쇄운동 357'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주소입니다. 쇄운동 202-1이나 200-6으로 찾아가세요. 용산사 용산서원 학규현판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조선 숙종 31년(1705) 이세필이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삼척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용산서원을 창건하고 학규 21조를 제정하여 이것을 손수 써서 판각한 것으로, 오늘날의 교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학규현판은 피나무판으로 가로 156㎝, 세로 48㎝의 크기이다. 용산서원은 그후 고종 5년(186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1966년 이곳의 사림들이 유서가 깊은 서원이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어놓았다. 이 현판의 글씨는 글자 모양이 가장 반듯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