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산-대구/유형문화재,기념물 114

울산 위열공김취려의묘(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김취려묘의 위치는 '언양읍 송대리 산 15'이다. 넓은 지역이라 찾기 쉽지 않다. 다음지도에 위치 표시도 실제보다 서쪽으로 150여m 치우쳐 있다. 김취려(?~1234)는 언양현 사람으로 아버지인 김부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그는 1216년(고려 고종 3)부터 1219년(고종 6)까지 거란군의 여러 차례 공격을 물리쳐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하였다.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크게 흥기하고 있었으며, 거란 역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게 되었다. 이때 김취려는 대장군으로 조양진(평안남도 개천시 조양)에서 거란군을 물리쳤고, 연주(평안북도 영변군)에서도 거란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은 청새진(淸塞鎭: 평안북도 희천)을 넘어 퇴거하였..

울주 언양지석묘(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

도로가에 언양지석묘 이정표가 보인다. 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지석묘의 상석은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석은 6매로 정도이고, 크기는 된 받침돌의 크기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언양 지역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울산 강동화암주상절리(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2호)

북구 산하동 952-1 북측~남측에 걸쳐 있다. 아래 사진은 북측에 있다. 주상절리는 분출화산암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서 나타나는 기둥모양의 수직절리로 용암이 화구로부터 흘러나와 급격히 식으면서 발생하는 수축작용의 결과로 형성된다. 주상절리는 수직으로 발달한 절리들에 의해 다각형(삼각형내지 육각형)의 단면을 갖는 기둥모양들이 서로 연결된 형태이다. 강동 화암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주상절리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주상절리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와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상절리들이 수직으로 발달하는 반면, 강동 화암 주상절리는 절리면이 지표면에 수평, 수직, 경사진 형태 등 다양한 방향으로 발달되어 있다. 특히 지표면과 평행하거나 비스듬하..

울산 남목마성(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

남목마성 가는 길은 주전봉수대(http://blog.daum.net/dbsqkqh/5794)가는 길을 참조하면 된다. 주전봉수대에서 서쪽으로 650여m를 뒤돌아오면 있는 삼거리이다. 우회전하면 하산길이고 직진하면 남목마성 가는 길이다. 단 봉을 박아 놓아서 걸어 가야한다. 남목마성까지 600여m이다. 초행길이고 산길이라 멀게 느껴진다. 다음지도에는 삼거리 근처 주전봉수대쪽에도 표시되어 있는데, 삼거리에서 남서쪽에 있는 남목마성이다. 마성(馬城)은 말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장 둘레를 돌로 막아 쌓은 담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쓸 말을 기르기 위해 주로 해안가와 섬 등을 중심으로 200여개의 목장을 설치하였다. 울산지역의 목장은 조선전기에 방어진목장[구목장], 방암산목장, 이길곶목장 등 모두 3..

울산 주전봉수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호)

주전봉수대를 찾아 가려면 울산시 동구 주전동 746에 있는 봉호사에 찾아가면 된다. 봉호사 바로 뒤에 있다. 봉수는 과거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의 군사통신제도이다. 조망이 양호한 산정에서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국경과 해안의 안위를 중앙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봉수제가 성립된 것은 1149년(고려 의종 3)으로, 1급에서 4급의 봉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수군의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5거 거화수 등 관계 규식 마련, 각 도 연변의 연대(烟臺) 축조, 봉수선로 획정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각 봉수에는 오장(伍長)과 봉수군(烽燧軍)이 교대로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烽],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울산 동축사삼층석탑(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동축사삼층석탑은 동축사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한다. 평소 같으면 울산 동구 동부동 425-2에 있는 동축사입구 노외공영주차장에 주차 하고 걸어 올라가야할것 같다. 본인은 코로나19와 평일이라 자동차로 동축사 근처까지 올라 갔다. 길은 험하고 비좁다. 동축사는 『삼국유사』「황룡사장육(皇龍寺 丈六)」조에 의하면, 573년(진흥왕 34) 처음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절이다. 그 후 934년(경순왕 8년), 고려 정종(靖宗)대, 1457년(세조 3), 1931년, 1975, 2005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동축사 삼층석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면석(面石)이 모두 없어져 원래의 정확한 높이를 알 수 없다. 탑신부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모두 한 개의 돌로 되어 ..

울산 수운최제우유허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2호)

수운 최제우 유허지는 12시 방향으로 간다. 출입 방지봉을 세운 곳으로 간다. 최제우(1824〜1864)는 경주 출신으로 호는 수운(水雲)이며, 외세의 침략과 봉건사회의 모순에 반대한 종교였던 동학(東學)의 교조(敎祖)이다. 가난했던 그는 장사를 하거나,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이었고, 의술(醫術)과 점술(占術)에도 관심이 많았다. 난세에 참된 도를 구하려 했던 수운은 양산, 울산, 경주 지방에서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해 도를 구하고, 그 이듬해부터 포교를 시작하였다. 1863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를 넘어 경기도까지 교세를 떨쳤다. 교인은 3천여 명에 이르렀고, 지방 종교조직인 접소(接所)는 13개소를 확보하였으나, 1864년..

울산 율리영축사지(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4호)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직선거리로 1km 나짓한데 돌아가야기에 멀다. 문화재청에 주소가 ‘청량읍 율리 822’로 되어 있는데 면적이 넓어 찾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근처인 ‘청량읍 율리 955’로 찾아가다보면 영축사지 안내판이 있다. 여기에 주차공간도 있다. 영축사지(靈鷲寺址)는 영축산, 문수산, 남암산 등의 산등성이와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영축산 자락의 말단부 평지에 위치한다. 영축사지 주변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망해사지와 청송사지가 1㎞내외의 거리에 있어, 이 일대가 통일신라시대 울산 불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영축사의 창건 유래는 『삼국유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683년(신문왕 3), 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오던 재상 충원공(忠元公)은 꿩이 매에게 쫓겨 굴정현(屈井縣)..

울산 청송사지부도(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을 구경하고 90여m되돌아오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있다. 길은 좁지만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청량읍 율리 1180-4'에 주차한다. 이 부도는 청송사의 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보물 제382호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부도 파변이 산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일명 ‘부도골’로 불리기도 하였다. 모두 3기이며, 조선시대의 돌종 모양[石鐘形]부도이다. 부도는 이름난 스님들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돌탑을 말한다. 오른편 부도는 높이 3m로 지대석, 기단석, 연꽃 좌대, 탑신(塔身)이 차례로 짜여져 있다. 기단석은 남북 면에는 인왕상을, 동서 면에는 연꽃무늬를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의 밑 부분에는 산스크리트 글자가, 윗부분에는 연..

통영성지(경상남도 기념물 제106호)-서포루

세병관 보고 서포루에 가는 길이다. 박경리 생가 안내판이 있다. 통영성은 왜적을 방어하고 거주지와 생업지를 갈라놓는 두 가지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조선 숙종 4년(1678)에 쌓기 시작하였다. 평지와 산지의 지형을 절충하여 지은 성곽으로, 해발 174.2m의 여황산 양쪽 등성 약 1,000m는 흙으로 쌓았고 나머지는 돌로 쌓았다. 성의 둘레는 2800m, 높이 4.5m이다. 성의 구조는 4대문과 2개의 암문(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도록 꾸민 작은 성문)과 3개의 포루가 있으나 지금은 인가가 들어서면서 성문의 주춧돌만 몇 개 남아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