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산-대구 580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경주 독락당은 옥산서원 북측으로 약600여m, 10분 거리에 있다. 이이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황 옥산정사 이산해 독락당 편액자동차로 옥산서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10월에 포항에서 생질 아들 결혼이 있어 대전에 사는 형님부부와 같이 갔다가 형님이 갑자기 옥산서원에 가보자하여 갔다. 사전 지식 없이 갔기 때문에 옥산서원에서 관광객의 추천으로 옥산서원 세심대쪽으로 우리 부부만 독락당에 걸어서 갔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

경주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

신도비는 옥산서원 안에 있어 오른쪽으로 간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중종~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으로 곱힌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主理論)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曺漢輔)와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을 통하여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 하였다. 이는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退溪) 이황(李滉) 의해 계승 발전 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1577년 대학자 회재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後學)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碑文)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경주 옥산 서원은 오른쪽으로 간다. 귀후재, 독락당,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국보 제40호)는 왼쪽으로 간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경주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

봉길대왕암해변(경주시 양북면 동해안로 1366-9) 앞에 위치한다. 대왕암이라고도 하는데 울산에 있는 대왕암과는 다른곳이다.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

경주 이견대(사적 제159호)

이견대 옆에 주차장(감포읍 대본리 668-1)이 있다. 문화재청에는 이견대가 '감포읍 대본리 661'로 되어 있는데 '감포읍 대본리 664-3'에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

나곡서원

나곡서원은 산수문을 정문으로 하여 강당, 동재, 서재를 배치하고 강당의 좌측에 사당인 봉산사를 배치하였다. 안당의 후손 안유가 장기현 오야리에서 은둔하다 세상을 떠나자, 후손들이 묘소를 오야리 야산에 모셨다. 이후 1936년 제당을 착공하여 1938년 6월 하순에 완공하였다. 1977년 나곡서원으로 성균관 인가를 얻어 순흥 안씨 문중에서 운영 및 관리를 맡고 있다. 안당(1460~1521)은 안향의 8대손으로 1506년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호조, 병조, 공조, 이조판서를 거처 1518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기묘사화로 투옥된 조광조를 구하려다 파직당하였고 1521년 신사무옥(1521)에 연루되어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사형 당하였다. 선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안간..

포항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2013년 86억여원을 투입해 포항시가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조성사업'으로 추진했으나 준공과 함께 '구룡포 근대역사문화거리'로 개장했다. 그 이후 명칭에 대한 설문결과를 토대로 2016년 10월 지금의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로 명칭을 변경했다. 가가와현에서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림집으로 지은 일본식 목조가옥을 포항시가 매입해 보수하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고, 훼손돼 가던 일본인가옥 27동도 보수했다. 2019년 방영한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덕분에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고,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촬영지로도 알려진 포항 12경(境) 중 하나다. 2012년에 국토해양부가 주최한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도시활성화 사업의 우수 사례로 선정되었다.

구룡포주상절리

구룡포읍 일출로62번길 65에 있는데 근처까지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다. 용암이 식을 때는 수축하면서 갈라지게 되는데 6각형의 돌기둥으로 된다. 논바닥이 가뭄이 들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현상과 같다. 돌기둥 단면이 4각형, 5각형도 있다. 학술적 가치와 희소성 등이 인정되는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 중문·대포해안의 주상절리대(443호), 광주 무등산 주상절리대(465호), 경상북도 포항의 달전리 주상절리(415호)가 있다. 울산광역시 산하동 해안의 강동화암 주상절리는 경상북도 기념물(42호)이다.

호미곶등대(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

호미곶등대는 호미곶해맞이 광장과 상생의 손 근처에 있다. 우리나라 지도상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등대이다. 이곳을 ‘호미곶’ 혹은 ‘동외곶’이라고 하는데, 서쪽으로는 영일만, 동쪽으로는 동해와 만나고 있어 일명 ‘대보(大甫)등대’라고도 한다.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겉모습은 8각형의 탑 형식으로 근대식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층의 천장마다 조선 왕실의 상징무늬인 배꽃모양의 문장(紋章)이 조각되어 있다. 1908년에 건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건축사적·문화재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니..